빛나되 번쩍이지 않는다


光而不燿 (광이불요) 빛나되 눈부시지 않는다眞光不輝 (진광불휘) 참된 빛은 번쩍이지 않는다

광이불휘라고 줄여부르기도 하는 것 같다. 뜻을 검색하다보니, '재주가 뛰어나다고 너무 뽐내면 해를 당할 수 있으니 자중해야 한다' 라고 해석된다고 나온다. 여기서 해를 당하는 것은 '나'다. 물론 이 뜻도 굉장히 좋지만, 이 해석만 들었을 때 이 고사는 안타깝게도 비슷한 많은 다른 명언들과 같이 단지 내 귓등을 스쳐지나갈 뿐이다. 그러나 입장을 바꾼 해석을 해보았을 때, 이 고사는 나의 깊숙한 곳을 건드린다. 입장을 바꾼다는 것은, 해를 당하는 것이 '타인'인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잘난 때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시점에, 어느 특정 부분이 남보다 객관적으로 나을 수도 있고, 사실 집단적인 착각으로 인해 나와 남 모두, 내가 남보다 났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 때 내 입은 내 빛남을 천지사방에 자랑하고 싶어 남에게 조언을 쏟아낸다. 그 조언은 내 빛을 품고 있어 번쩍인다. 그 번쩍임은 너무 날카로워서,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만들고 그 이의 눈은 상처를 받는다. 그 빛은 눈을 감아도 잔상으로라도 보인다. 피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빛난다고 해서 그 빛으로 다른 이를 상처주지 말라는 얘기다. 빛이 너무 세면 화상을 입기도 하니까.



비슷한 맥락에서 내게 큰 충격을 준 글귀가 있다.

In my younger and more vulnerable years my father gave me some advice that I've been turning over in my mind ever since. "Whenever you feel like criticizing any one," he told me, "just remember that all the people in this world haven't had the advantages that you've had."           -위대한 개츠비 中

사실 난 아직까지 <위대한 개츠비>를 책으로 읽어보지 못했다. 영화로만 한 번 봤을 뿐이다. 그 영화조차도 데이지의 헤어스타일 외에는 나에게 별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인터넷 어딘가에서 읽는 순간, 나에게 불같은 창피함을 안겨주었다.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문장을 만난 시점이 좋았던 것 같다. 그 당시의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깊게 성찰해보고 있었다. 문제 많은 가족이었지만 원망하지 않는 것이, '모두가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이런 것 뿐이다. 가족 중 누구도, 나 조차도, 잘못이 없는 사람은 없지만 잘 못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 성장의 한계였던 때가 지나고, 내가 가지고 있던 배경에 대해 생각이 미치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괜찮은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고 또한 훌륭한 어른이 아니었기 때문에 좋은 부모님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쁜 부모라고 손가락질 받을 만한 분들은 아니었다. 나쁜 결과를 낳기는 했지만, 어긋난 방향으로라도 자식들에게 최선을 다하려 했다. 감사와 이해, 는 잘 모르겠지만 부모님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고 이 정도나마 누리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 전까지는 내가 가지고 있던 배경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뭘 잘 해내면 그게 온전히 내가 잘난 덕인 줄 알았다. 그래, 비록 이전에는 모자란 놈이었지만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을 이뤄냈어. 이런 마음이었다. 혼자만 만족하고 말았다면 참 좋았을텐데, 워낙에 이룬 것 없는 삶이었기 때문에 작은 것 하나라도 성공을 맛보면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었다. 친구들이 나는 그거 못 했는데, 넌 대단하다. 라고 말해주면 너는 왜 못했는데? 실패한 요인이 뭐였다고 생각해? 노력이 부족하거나 방법이 잘 못 되었던 것 아니야? 나는 이런 방식으로 해냈어, 너도 한 번 꼭 실천해봐. 라고 대답했다. 힘들다. 라고 말하는 친구에게는 나도 힘든데. 이것도 싫고 저것도 마음에 안 들어. 근데 너는 왜 힘들어? 그 때는 이렇게 생각하면 안 힘들 것 같은데? 생각의 방식을 바꿔 봐. 라고 말했다. 그 당시의 나는 남의 사정도 제대로 모르면서 함부로 말을 하는 사람들을 혐오했었는데, 정작 나 자신은 왜 내가 혐오하는 방식 그대로 행동했는지 모를 일이다.

내 인간관계는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도 좁았고, 독서의 범위도 좁았으며, 집에 있는 걸 지독하게 좋아하는 데다가, 혼자 있는 시간까지 절대적으로 많다보니 자연스레 사고의 영역은 나 자신, 그리고 고작해야 가족까지 밖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에 관심도 지식도 지나치게 없다는 것은 대학생 신입생 시절 즈음부터는 문제의식으로 느끼게 되었지만, 신기하게도 친구들의 삶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적도 없었다. 관심이 없었으니 당연히 그들에 대해 몰랐고, 몰랐으니 쉽게 말들이 나온 것이겠지. 내 무관심에서 나온 지적질과 충고질이 내가 전혀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 그들을 얼마나 상처입혔을까. 차라리 그들이 굉장히 강해서 내 말들이 공격은 했지만 전혀 상처 입지 않았거나, 내가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 하찮은 존재였어서 내 말들을 공격으로 느끼지조차 못하고 잊어버렸기를. 아니면 천만다행으로 내 말대로 했다가 일이 잘 풀렸기라도 하기를.

내가 뭐라고 그런 말들을 지껄였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다른 이에 비해서 엄청나게 큰 것이거나 작은 것일지도 모르는데, 그들에 대해 1퍼센트를 알까 말까 하는 내가 뭐라고 그렇게 행동했을까. <위대한 개츠비>의 저 문장을 보는 순간, 그 동안의 내 볼썽사나운 모습들이 머리를 촤라락 스쳐지나갔다. 당장 주위의 모두에게 연락해 혹시라도 내가 과거에 이런 적이 있다면 제발 부디 잊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로 창피함이 솟아오른다. 이 창피함을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 반성은 했더라도 그'랬었'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고, 행동이 즉시 바뀌지도 못 할 테니까.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시도 때도 없는 잔소리가 마냥 지겨웠다. 커서 돌이켜 보니 사실 아버지께서 하신 말들 중 틀린 말은 없었다. 다만 내가 원치 않던 때, 원치 않던 형태로 나에게 날아와, 닿지 않고 부딪혀서 부서졌을 뿐. 그래서 그 때는 생각했다. '좋은 의도'로 해주는 모든 얘기들은 문 같아야 한다고. 집 안으로 들어와도 되는, 혹은 들어와야 하는 사람이 두드릴 때만 문은 열려야지, 노상 열려있기만 한다면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나을테고, 이상한 사람에게 열린다면 집주인이 위험해 질수도 있다. 하지만 저 두 글귀를 맞딱드린 이후로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러한 말들이 문 같아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다만 언제 열려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좀 혼란스러워졌다. 항상 열려있어도 안 되고, 이상한 사람에게 열려도 안 된다. 그렇지만, 들어와도 되거나 들어가야 하는 사람이 문을 두드린다고 해서 무조건 다 열려야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문은 열렸지만 문턱을 넘어 올 수 없는 상황에 상대방이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이 문을 두드렸다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한 상태가 아닌지, 실수로 문을 두드린 것은 아닌지, 문을 두드리기는 했지만 막상 들어올 용기는 안 나서 그냥 돌아가려다가 나에게 붙잡힌 것은 아닌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게 문인지도 모르고 한 번 쳐 본 것은 아닌지. 또 나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고 해서 그 때마다 문을 열어야 하는가? 문을 확 열어졌혔다가 바깥에 있던 상대방이 문에 맞아 상처 받지는 않을지. 문을 확 잡아 당겨 열었다가 문고리를 잡고 있던 상대방이 안쪽으로 넘어져 다치지는 않을지.

말 한마디, 절대로 함부로 꺼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만 커져간다.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꿀 만큼 좋은 얘기를 할 자신은 없으니, 그저 들을 수 있는 귀를 키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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