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와 나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살 때는 요리라고 할 만한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요리까지 해 주시는 가사도우미 분이 집에 오셨고, 가사도우미 분이 오시지 않는 주말에는 아버지께서 밥을 해주셨다. 좀 크고 나서는 밖에서 사 먹거나 시켜 먹는 것에 맛이 들었다. 아주 가끔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에서 내 입맛에 맞아 보이는 음식을 봤을 때 몇 시간씩 주방을 뒤집어 놓았지만, 그건 먹고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춘 요리라기 보다는 가벼운 도전같은 것이었다. 그럴 힘도 돈도 있는 상태에서 자극이 전달되었을 때 별 생각 없이 그 자극이 이끄는 방향으로 튀어 나가는 것 말이다. 전기밥솥으로 밥을 짓는 것도 20살이 되어서야 처음 해봤다. 계량컵이 없으면 항상 쓰던 냄비가 있어야만 물 양을 맞춰 라면을 끓일 수 있었다. 이때까지 나에게 요리란 설거지를 만들어내는 활동이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아픈 것다음으로 설거지를 싫어한다.


독일에 와서 두 달 동안은 아는 분 집에 얹혀 살면서 한국에서 살 때보다 더 잘 얻어 먹었기 때문에 요리할 일이 없었다. 진정한 요리를 처음 겪은 것은 그 두 달 뒤에 또 몇 달이 지난 때였다. 이 때는 내가 이사를 해서 혼자 살 때기도 했다. 이사 하고 나서 한 달은 빵과 샐러드, 냉동피자로 때웠다. 식빵을 토스트기에 넣고 잼과 크림치즈, 버터를 바르고 채소를 썰고 냉동피자를 냉동실에서 꺼내와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는 게 조리과정의 전부였다. 두 달째부터는 밥이 너무 먹고 싶어졌다. 하지만 밥을 지어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아 이미 선물 받은 전기밥솥이 있었음에도- 중앙역 근처에 있는 중국집에서 가장 싼 메뉴를 사다 먹었다. 가장 싸기는 했지만 쌓이면 꽤 큰 돈이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두 번만 사다가 7등분으로 나누고 아침에만 먹었다.


돈 아끼고, 설거지 거리 줄이고, 요리 시간 줄여 다른 곳에 쓰고. 하여튼 여러모로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계부를 보자 식비가 생각보다 많이 나왔고, 설거지 거리는 이러나 저러나 나오고 있었으며, 칼질이 서툴러 채소 자르는 데만도 한 세월이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뭔가를 먹어도 만족스럽지가 않고 뭔가 찜찜했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여하간 그것이 먹고 싶다는 강렬한 짜증이 울컥 솟아오를 때가 아주 가끔 있었다. 그 짜증은 독일어 시험을 준비하던 연말로 갈수록 잦아졌다. 그리고 시험을 본 직후 폭발했다. 이 시험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6주가 걸리는데, 난 하필이면 시험을 영 찜찜하게 치른 터라 그 6주를 불안 속에서 떨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독일의 겨울은 오후 4시면 이미 해가 져 깜깜하다. 안 그래도 햇빛 한 줌 보기 힘든 날이 많은데 하필 내가 독일에서 처음 보낸 이 겨울은 이상한파가 온 유럽을 덮었던 때였다. 없던 우울증이 생기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이었다.


왜 스트레스를 받는데 뭔가를 먹고 싶다는 욕구가 들지? 한창 힘들어하던 이 때는 생각도 못했던 질문이었지만 많이 안정된 지금은 알 것 같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행동이 욕구로 튀어나오는데, 이 때의 내 경우에는 먹고 싶어!’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당장 슈퍼로 가 군것질거리를 잔뜩 사왔다. 그리고는 고작 한 입 먹고 스트레스만 또 받은 채 서랍에 넣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한국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줄 알았다. 한인음식점에서 파는 음식들은 영 내 성에 차질 않았다. 그래서 한인식품점서 눈에 익은 재료들을 대충 사와 무작정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다. 정말로 요리를 했다.


, 치킨, 떡국, 짜장면, 탕수육, 감자전, 멸치국수, 미역국, 소고기고추장볶음, 밥버거, 장조림, 닭죽, 오이소박이, 계란국, 애호박전 따위를 만들었다. 말 그대로 형편 없는 결과물들도 있었고 들인 재료와 노력에 비하면 아쉬운 결과물들도 많았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만든 음식의 맛과는 상관없이 요리를 한 뒤에는 항상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어쩔 때는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내가 원했던 것이 정말 그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면, ‘내가 그 끔찍해하는 요리를 했는데 돌아오는 건 이 따위 형편없는 맛이야?!’하며 또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말이다. 내가 이 때 깨닫지 못했던 것은, 들끓었던 그 욕구는 정말 필요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스트레스를 풀기만 하면 그 욕구는 수그러든다. 이 때 그 다른 방법은 요리 행위 자체였다.


돈을 주면 쉽고 빠르게 원하는 음식을 얻을 수 있었을 때는 왜 저런 번거로운 짓을 하지?’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던 그 행위 말이다. 그 때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요리를 한다는 사람들을 단 한 부분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자체가 스트레스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직접 요리를 해보니 알겠더라. 손을 베거나 두께가 달라질까 눈을 부릅뜨고 칼질을 할 때. 불에 올려놓은 재료가 타거나 액체가 끓어 넘칠까 옆에 달라붙어 있을 때. 재료의 양을 정확히 재야할 때. 다른 생각이 들 순간이 한 번도 없었다. 자연스레 날 괴롭히던 잡념과도 멀어지게 된다. 온전히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요리 생초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요리 초보는 내 눈 앞에 있는 것 외에는 신경을 쓸 수가 없으니까. 어쨌든 중요한 건 요리의 결과가 아닌 요리를 통해서 스트레스가 풀렸다는 것이다.


내 경우에 요리가 가지는 순기능은 이 밖에도 세 가지나 더 있다. 첫째로 내 나쁜 버릇들에 특효약이라는 것이다. 나는 성질이 급하다. 원하는 것이 생겼는데 그게 당장 이루어지지 않으면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려 한다. 그런데 요리를 해서 먹고 싶은 것을 먹으려면 숨이 세 번 정도 넘어가도 참아야만 한다. 적당한 조리법을 찾아야 하고, 필요한 재료를 사와야 하고, 사온 재료를 손질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숙성이나 해동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며, 먹고 나면 뒤처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먹고 싶어 시작했고 나 말고는 해줄 사람도 없기 때문에 짜증을 내도 소용이 없다. 내 나쁜 버릇 중 또 다른 하나는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 과정을 상상하고는 지레 질려 시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리는 인간의 3대 욕망 중 하나인 식욕이 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과정이고 뭐고 무거운 몸뚱이를 일으켜 당장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하다 보면 말했다시피 당장 하고 있는 행위에 온 정신이 팔려 뒷일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요리는 또한 공허함을 먹는 행위로 채우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니,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기 보다는 그러지 않도록 스스로 규제를 걸게 만들었다는 쪽이 맞는 표현 같다. 일단 식사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요리밖에 없다.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공연히 요리를 하게 되면 초점이 자연히 자극적인 맛으로 치우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자극적인 맛은 금방 질리고 막상 먹었을 때 만족스럽지 않은 때가 많다. 스트레스가 폭발해 요리에 대한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요리를 해도 스트레스를 낮추는 효과는 없고 오히려 공허함만 크게 해 악순환에 빠질 뿐이다. 최소한 이 악순환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정말 배고픈 경우만 요리를 해서 먹으면 된다. 배고프니까 조금 망친 요리라도 맛있게 다 먹을 수 있다. 움직임이 많지 않는 나에게 진짜 생리적 배고픔은 사실 하루에 세 번까지는 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요리를 해 먹을 일도 하루에 세 번까지는 없는데, 그에 반해 군것질은 쉽고 빠르게 만족을 얻을 수 있으니 저절로 손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면 하루가 가도 배가 고파지지를 않으니 요리를 해서 식사를 할 수가 없다. 위에서 말한 악순환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무슨 음식을 요리하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군것질을 절제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동안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가 얼마나 구분 못 했는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요리의 장벽은 내 생각보다 훨씬 낮았다. 지난 날의 나를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지 않았고 그래서 몰랐던 것뿐이니까. 하지만 앞으로 직접 겪어본 적 없는 것에 대해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는 일은 한층 더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리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생각보다 중요한 활동이다. ‘먹는 것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물이고 생물은 먹지 않고 살 수 없다. 곧 요리는 삶과 연관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요리의 중요성은 같이 사는 사람이 있는 사람들보다는 특히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서 더욱 크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사람이 혼자 해결해야 하는 것이 음식뿐인 줄 아느냐 하겠지만 여기서는 혼자 사는 사람의 다양한 일과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혼자 사는 사람과 혼자 살지 않는 사람의 식생활을 서로 비교하는 것이다-.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혼자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먹는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이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대신 해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요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남자건 여자건 나이 들었건 젊건 상관 없이 모두 해당된다. 혼자 사는 남자라 제대로 된 음식을 못 먹는다는 얘기는 죄다 게으른 헛소리다. 갑자기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났는데 너무 비싸거나, 파는 곳이 주변에 없거나 하는 이유로 돈을 주고라도 남에게서 음식을 얻을 수 없을 때, 이 작은 상실이 내 삶에 미치는 여파는 생각보다 클 수 있다. 그 때는 울면서라도 칼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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