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M

오래 알고 지내온 친구가 있다. 그 친구, M은 내 아픈 손가락이다.


M의 어머니께서는 일찍 돌아가셨다. 우리가 스물 세 살이었을 때.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내 주위 사람의 부고를 들은 것은 이 때가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것이었고, 두 번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외할머니의 것이었다. 두 번 다 전혀 슬프지 않았다. 반어법이 아니라, 정말로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담임선생님께서는 2학기 때 임신 휴가를 가셨는데, 아이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방학 중에 장례식도 갔다 오고, 운구차가 우리 학교 운동장을 돌 때 반장으로서 영정 바로 뒤를 따라 걷기까지 했다. 단 한 번 만난 적 없는 어머니께서도 안타깝다며 우셨는데, 나는 장례식장을 갔다가 오늘 길에 피씨방을 갈 정도였다. 나중에 같은 반 친구 하나에게서 네가 한 번도 안 우는 것을 보았다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장난 반의 타박까지 들었다.


외할머니께서는 치매로 오랜 시간 투병하시다 아흔 가까이 때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와 외손녀 관계지만 아주 어릴 적에 외갓집에 몇 번 놀러 갔던 이후로는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두어 번 정도밖에 못 뵈었다. 사실 아직까지 성함도 모른다. 돌아가셨을 때도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장례식에 같이 갔던 친구 하나가 괜찮으냐며, 네가 너무 밝아서 오히려 걱정했다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을 정도였다. 다만 어머니께서 너무 많이 우시는 것이, 내가 어머니를 달래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많이 슬펐을 뿐이었다.


그리고 M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그 때는 왜 그렇게 슬펐을까.


만약 내 친구들 중 가장 먼저 부모님을 여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내가 될 것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왔다. 나는 늦둥이로, 우리 부모님께서는 친구 부모님들 중에서 월등히 연세가 많으시기 때문이다. 말 많고 탈 많은 가족이지만, 그런 만큼 가시밭길을 서로 같이 뒹굴고 머리채를 잡으며 살아온 그 구성원들 중 하나라도 잃는다면 그 복잡하고 기묘한 상실감을 어디에서도 이해 받지 못하며 홀로 썩은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어렸을 때부터 느꼈다. 그렇게 살던 중, M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M을 위로하던 중 어느 생각이 얼핏 뒤통수를 스쳤다. ‚, 나중에 내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더라도 나 혼자는 아니겠구나.‘ 끔찍하고 징그러웠다. 친구의 불행에서 일말의 안도감을 얻는 나 자신이. 아무한테도 얘기한 적 없다. 그래서 더 켕긴다.


M이 아픈 손가락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또 있다. M 어머니의 부고를 들었던 때는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이었다. 원래 일찍 잠드는 편인데, 그날은 유난히 잠이 안 왔다. 누워서 핸드폰을 하는 중에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하나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봤는데, M의 친구가 보낸 문자였다. M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장례식장은 어느 곳이며, 최대한 빨리 다른 M의 친구들에게도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순간 멍해졌다. 일단 핸드폰 화면을 껐다. 이불 저 멀리로 핸드폰을 밀어버리고 눈을 감았다. 마치 눈을 감으면 잠이 올 테고, 그러면 아무것도 보지 못 한 채 굴 수 있을 거라고 뇌가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는다. 눈꺼풀이 점점 크게 떨려왔다. 결국 핸드폰을 잡고 문자를 보낸 M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불을 걷고 불을 켜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왠지 모르게 너무 무서웠다. 웅크린 채로 이불을 몸 주위로 틈 없게 둘렀다. 전화를 받은 M의 친구는 담담한 목소리였고 내 목소리만 줄곧 떨림과 울음을 담은 채 흘러나왔다. 전화를 끊은 뒤 최대한 많은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나니 그 다음에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부모님께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방에 들어가신 어머니께서는 벌써 잠에 드셨을 수도 있다. 가뜩이나 수면장애에 시달리시느라 조그만 소리에도 쉽게 깨시기 때문에 방문을 열 수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너무 많이 슬퍼하실 것 같았다. 결국 아버지 방문을 두드렸다. 다행히 아직 잠 들지 않으신 상태였던 아버지께서는 문을 여셨고 나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놀란 아버지는 왜 그러냐고 물으셨고 나는 자초지종을 말했다. 혼자 낯선 곳으로 내몰리는 아이의 심정으로 내심 아버지께서 같이 가자는 말씀을 해주시기를 바라며, 지금 장례식장으로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얘기를 다 들으시더니 네 마음은 알지만 지금은 현실적인 절차로 복잡할 때인데 어린 네가 가봐야 도움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힘든 사람들 옆에서 감정적으로 더 힘들게 만들 뿐이다, 게다가 지금 장례식장을 가면 학원은 어떻게 할 것이냐, 날이 밝고 학원 수업을 들은 뒤 자습은 하지 말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는 내가 회계사 시험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부모님을 포함해 주위 사람들에게는 회계학원에서 종합반을 다니고 있다고 말해 놓았지만, 사실은 그 학원과 같은 건물에 있는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시험에 붙은 뒤 사실은 혼자 공부했노라고 뻐기고 싶은 허영심 때문이었다. 차마 그 때 아버지께 사실 저는 학원을 안 다니고 있어요, 갈 수업도 없으니 지금 당장 장례식장을 가겠어요, 라고 말 할 수 없었다. 사실을 밝힐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날이 밝고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오후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내가 문자를 받은 즉시 새벽에 장례식장을 갔다고 해서 M이 덜 슬퍼했거나 기뻐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M에게 그 정도의 존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M의 입장이었더라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친구가 옆에 있다고 해서 슬픔이 가라앉았을 것 같지 않다. M은 내가 문자를 받은 새벽이 아니라 낮에 빈소를 찾았다는 사실조차 지금은 잊었을지 모른다. 아마 이 모든 건 내 공연(空然)한 죄책감일 것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지만, 나는 도둑질조차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M은 내 아픈 손가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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