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와 기차

나는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의 역사를 학교에서 '배웠다‘. 그 한복판에서 몸으로 겪으며 크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이과를 나왔기 때문에 그마저도 일주일에 한 번 있었던 근현대사 시간 끝물에 들었을 뿐이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멀고, 입 밖으로 내놓기에는 어딘가 근지럽고 낯 뜨거운 단어였다. 피를 흘리고, 경찰에 잡혀가고, 고문을 받고, 화염병을 던지고, 삐라를 뿌리고, 수배자 생활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 추구라고 생각했고, 근현대사 시간에 배웠듯이, 수많은 사람이 과거에 그렇게 했으니 지금은 당연히 민주주의가 완성된 사회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보다, 한 번도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단 한 순간도, '지금 우리나라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인가?‘하는 의문이 머릿속에 든 적이 없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곧잘 저녁 뉴스를 보기는 했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지는 않았다. 아예 안 보는 사람들보다야 주워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은 많았지만, 해당 뉴스의 배경에 대해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뉴스는 자기들끼리만 아는 '은어들을 만들어 사용했고, 신문은 너무 어려웠으며, 자세한 속사정까지 알려면 광복 이전으로까지 거슬러가야 했다. 정치를 알기 위해 넘어야 할 장벽은 높았고, 그 때의 나는 그 장벽을 넘을 만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내가 소위 '입정치를 했던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얼마간의 단어들은 주워들어 알고 있는 상태에서, 남들에게 멋지고 다르게 보이고 싶은 허세도 있었으니까. 보다 정확하게 내 경우에는 '상태메시지정치였다. 소셜미디어는 안 했기 때문에 카카오톡이 희생양이 됐다. 광복절에 카카오톡의 프로필사진과 상태메시지를 태극기와 8.15로 바꾸기는 했지만, 독립까지와 그 이후의 역사를 공부하거나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에 대한 처우가 어떠한지 따위에 대해서는 알아보지 않았다. 어른들이 하는 대로 정치인들을 욕하기는 했지만, 그 정치인들이 어떻게 정치인이 되었고 어떤 입법활동을 했고 왜 그런 언사를 했고 그게 정말 욕할 일이었는지는 알아보지 않았다. 내 고유의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많이 아는 어른인 아버지의 말에 영향을 받았다. 저 사람은 사람들이 진보라고 부르는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이며 그러니까 편 들어야 하고, 저 쪽은 보통 보수라고들 하니까 나쁜 사람이고 그러니까 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왜?는 없었다. 나 하나 정치에 깊게 관심 가진들 뭐가 크게 바뀌겠냐는 생각도 있었고, 사람들이 별 행동을 안 하는 걸 보면 충분히 살기 좋은 사회인가보다 싶기도 했다. 그런데 굳이 내가 나서야 해? 내가 뭐라고?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나?


그리고 2016 11월이 왔다. 10월 한 달은 언어시험 준비에 매달리느라 한국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11 8일에 시험을 치르고 며칠을 시체처럼 지낸 뒤 인터넷을 들어가니 한국은 이미 뒤집힐 대로 뒤집힌 상태였다. 처음에는 생판 남의 얘기인 듯 전혀 와 닿지 않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감이 안 왔다. 분노와 충격은 시간이 지나면서 높은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덮쳤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대한민국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 아니었어? 그걸 위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고 했잖아. 난 그렇게 배웠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어느 어른도 말해주지 않았잖아. 누구도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해주지 않았잖아.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는 말이 이 뜻이었구나. 외면한다는 것이 아예 거들떠도 안 본다는 뜻이 아니라 나처럼 무늬만 흉내 내는 것도 해당되는 말이었구나. "10년마다 사고가 나는 나라에서 제도를 바꾸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서 자신이 똑 같은 일을 겪었다.는 말이 이 뜻이었구나. 지금 나는 당장 나한테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해서 의식 저 편으로 밀어놨다가 편할 때만 찾았던 죄를 받는 거구나. 그럼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분노는 나에게 정치의 장벽을 뛰어넘고자 하는 의지를 주었다. 지금부터 책 읽고 공부해봐야 다 알 수 있겠냐는 패배주의에서 벗어나 뭐라도 좀 알아야겠다는 다급함에 EBS에서 법과 정치 강의를 듣기 시작했을 때, 선생님이 했던 말은 충격이었다. 흔히들 생각하는 정치는 직업정치인이 하는 좁은 의미의 정치고, 그 외에 사회에 관여하는 모든 행위 또한 넓은 의미에서 정치라고 했던 그 말. 선거에 직접 출마하거나, 피 흘리거나, 시위에 나가 전경들과 싸우는 것 외에 나같이 소심하고 훌륭하지 못한 사람도 정치를 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왜 이 모습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뭐라고 논할 수 있을 만큼 알기까지는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으니 그냥 포기하자는 마음은, 혹시나 남들에게 부족한 지식이나 논리를 비판 받을 것이 두려워 만든 비겁한 변명이다. 나는 이제 초등학교에서 덧셈 뺄셈부터 배우던 것처럼 부족하고 느려도 좋으니 정치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고, 스스로 생각하고, 쓰고, 말해 볼 것이다. 나는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내 아이가 좋은 세상에서 살길 바라기 때문에 노력합니다.“라는 얘기는 못 하겠지만, 후세를 위한 노력은 할 것이다. 그것이 "사회혁명의 불벼락이 국가권력을 덮치기 전에 이미 권력 내부에 들어와 있었던 사람(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179p)“으로서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물려주면, 후세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무슨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다시 정치에 무관심해 질지도 모르겠다. 평화가 오래가면 전쟁을 들먹이는 일이 쉬워지는 것처럼, 그게 인간의 속성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건 나중 일이고. 나는 지금을 사는 사람으로서 할 일을 할 뿐이다.

내일은 그 의무를 통감한 사람들이 일궈 낸 새로운 변화의 첫 단추를 끼우는 날이다. 대통령이 누가 되건, 내가 다시 옛날처럼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거라며 표 하나 던지고 그 다음에는 외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미디어 왜곡과 여론조작으로 인한 중우정치의 위험은 우리의 발밑에 똬리를 틀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있고, 시민들이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대안미디어를 활용해 언론권력의 여론조작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 위험에 또 발뒤꿈치를 물리게 될 테니까(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125p).“ 그렇다고 설마하니 2번 후보가 된다고 한다면 그 미래는 정말 많이 암담하겠지만...그래도 두 눈을 더 시퍼렇게 뜰지언정 감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이 가장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하여 많은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과 강점은 사악하거나 거짓말을 잘하거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지극히 무능하거나 또는 그 모든 결점을 지닌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나쁜 짓을 마음껏 저지르지는 못하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선거는 다시 실망하기 위해서 매번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비극적 이벤트가 아니다. 뽑아놓은 지도자가 알고 보니 최선의 인물이 아니었다거나, 선하기는 하지만 능력과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실망할 일 없다(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116p-118p).“ 세상에 완벽은 없다.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가 분석하고, 잘못한 점이 있다면 반성하고, 다음 번엔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항상 눈을 부라리고 있으면 된다.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기차에서 내리고 기차는 멈춘다. 움직이지 않고 멈춘 상태로 오래 된 기차는 녹슬어 망가진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사회가 민주주의가 구현된 사회라고 믿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으면 그 순간 어디선가 뒷걸음질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이 뭔지도, 애초에 그런 게 존재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삼자. 이상은 함수값이 아니라 극한값이다.

인상 깊게 읽었던 두 구절로 글을 마무리하겠다. 내일, 모두가 자신의 한 표를 정말 소중하게 미래로 던졌으면 좋겠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 그래서 4,700만 국민이 모두 양심을 갖고 서로 충고하고 비판하고 격려한다면 어떻게 이 땅에 독재가 다시 일어나고, 소수 사람들만 영화를 누리고, 다수 사람들이 힘든 이런 사회가 되겠습니까?” (강원국 <대통령의 글쓰기> 170p)


"민주주의에 완성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끊임없이 진보합니다. 우리 민주주의도 선진국 수준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뤄가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대화와 타협, 관용, 통합을 실천해야 합니다. 미래를 내다보고 민주주의의 완전한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나가야 합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강원국 <대통령의 글쓰기> 2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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